도검난무 ) 글 백업
1
가끔 나는 꿈을 꾼다. 한밤중 네가 좁은 새장 같은 방을 나와 피 같은 단풍이 가득 찬 정원 쪽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을. 바람에 네 금빛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물결을 담은 푸른 눈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 상상을.
하지만 한 때의 꿈에서 깨어나면 내 옆에서 세상만사 하나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로 잠들고 있는 네가 있다. 너는 종종 나를 붙잡고 여보, 여보… 하면서 운다. 사랑스럽지만 안정되지 않아서 금방이라도 으깨어진 나비의 날개 가루처럼 흩어질 것만 같은 네가 있다.
그래도, 그런 너여도 나는 네가 좋아, 사랑해, 유즈루. 내 사랑, 내 어여쁜 사랑, 내 영원이 될 물결같이 흔들리는 사랑. 이치고 히토후리라는 우리 안에서, 천천히 썩어가는 내 사랑. 그래도 곱게 남을 나의 유일한 사랑.
2
이치노세 유즈루의 히스테릭을 말릴 수 있는 남사는 웬만해서 없다고 봐야한다. 그가 가장 의지하는 이치고 히토후리마저 그의 광기가 만월처럼 그득히 차오른 날에는 뺨을 맞고, 욕지거리를 듣는 게 일상다반사이니.
사랑해요, 사랑해, 이치고, 여보, 여보, 이치고, 이치노세 유즈루가 흐드러져 떨어진 꽃잎처럼 주저앉아 오늘도 흐느껴 운다. 세계가 빙글빙글 흔들린다, 일렁이는 불꽃 속이다. 잿더미 사이로 이치고 히토후리가 그의 손을 잡는다. 울다 지친 상태로 올려다보니 입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그가 그려진다. 무어라 말하는 지 알 수 없어, 나에게 비밀을 둘 생각 하지 마, 이치고 히토후리! 이치고 히토후리! 나에게그어떤것이라도숨기지마이치노세유즈루는다시아이처럼떼쓰고운다그를유일하게껴안는건이치고히토후리뿐이다괴로워싫어미워좋아해사랑해아아나를경멸해줘흔들린다세계가멈추지않는다또제멋대로야아득해져간다아득해진다눈에보이는건오직…
1
카센 카네사다는 종종 상상하곤 했다, 서적 속의 사진에서만 보았던 바다에 대해서. 눈을 느릿하게 감으며 넓은 모래사장에 선 자신의 모습과 발 밑에 스며드는 액체의 차가운 감촉과 눈 앞에 보이는 맑고 푸르른 바다를 생각하면 실제로는 얼마나 풍류가 느껴질지 가슴 안쪽에 여름정원에 핀 생동감 넘치는 꽃들을 봤을 때와 같은 두근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눈을 그대로 꼭 감은 체 계속 상상을 이어나갔다. 바다를 떠올렸으니 하늘을 떠올려보자라는 생각을 품으며 낮의 선명한 푸른 하늘인가 아니면 밤의 고요한 짙은 하늘인가 의식에 몸을 맡겨본다. 자신이 눈을 감고 생각한 하늘은 깨진 유리가 총총히 박힌 까맣지만 푸른 밤하늘이었다. 그리고 밤하늘에 박힌 유리같은 별빛이 바다 위에 그대로 반사되는 풍경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펼쳐지는 것이 마음에 흡족함을 채워넣어 절로 미소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잠시 상상을 멈추고 눈을 뜨자 그의 앞에 사요 사몬지가 조금은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카센 카네사다는 사요 사몬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 사요?"
"... ...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으, 으응... ... 그게."
밤바다를 생각했어, 라고 어딘가 수줍은듯 웃으며 카센 카네사다가 입을 열었다.
"밤바다?"
"우리는 검이니까 바다에 갈 일이 없잖아. 주인이 준 책에서 본 바다가 인상에 깊었어."
"... ... 그러면 밤은?"
"글쎄... ... 아무래도 사요의 영향이 아닐까?"
"나?"
사요 사몬지가 꽤 침착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어본다.
"사요의 이름에는 밤이 있잖아. 작은 밤, 얼마나 우아한데. 사요도 알잖아? 내가 풍류와 우아함을 사랑하는 거."
"... ... 알고 있어."
카센 카네사다가 즐거운듯한 목소리로 풍류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한 얼굴을 한다.
"사요!"
"응?"
"우리, 주인한테 부탁해서 같이 바다라는 곳에 가자고 하지 않을래?"
"같이?"
"응. 기왕이면 밤바다였으면 좋겠어, 내가 상상한 것처럼."
"무엇을 상상했는데?"
"사요도 눈을 감고 나랑 같이 떠올려보자."
그가 사요 사몬지의 손을 잡고 아까 전처럼 눈을 감으며 입으로 자신이 떠올린 풍경을 하나씩 시를 읊조리듯이 입으로 내뱉었다. 부드럽고 하얀 모래사장 위를 걸었다, 파도가 밀려오고 물의 차가운 감촉을 발로 생생히 느꼈다, 눈 앞에는 사요처럼 푸른 바다가 펼쳐져있고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면 사요의 이름처럼 밤의 하늘이 보이고 여기저기 뿌린듯한 별빛이 바다 위에 반사되어 아름답다. 그는 제 입으로 말하고 있으면서도 생각하는 것 자체로도 기분이 좋았다. 사요 사몬지가 살짝 눈을 뜨고 황홀경에 빠진 카센 카네사다를 본다. 상상만으로 행복해보이는 그가 어쩐지 평소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사요 사몬지는 그의 이름을 속삭이듯 불러본다.
"... ... 노사다."
네가 말한 것처럼 언젠가 바다를 보러가자, 노사다가 말하는 바다는 분명 아름답겠지. 나는 노사다의 뒤에 서서 따라갈게, 라고 그가 말한다. 아니야, 뒤에 서 있지마 사요. 같이 옆에서 손을 잡고 밤하늘과 바다를 보자, 주인에게 사진이라는 것도 찍어달라고 하자. 사요 너와 추억을 아름답게 남겨놓자. 헤어졌던 시간이 있으니까 그 시간 속에 박혀있던 외로움을 빼내고 메울 추억을 만들자.
카센 카네사다가 말한다, 그가 웃는다. 사요 사몬지도 어딘가 머쓱한 웃음을 입가에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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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센, 사요. 준비는 다 됐어?"
"다 됐단다."
"... ... 응."
사요 사몬지와 카센 카네사다는 주인이라 부르는 이와 함께 본성 정문 밖으로 나섰다. 며칠 전, 카센 카네사다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그가 밤바다를 생각했고 우리들은 검이니까 바다에 간 적 없다는 말을 했었던 게 떠올랐다. 물론 자신을 향해 주인에게 부탁해서 같이 바다에 가자고 한 것도. 그리하여 카센 카네사다는 진짜로 주인에게 밤바다에 가자는 것과 사진을 찍어달라는 두가지 청을 했고 그들의 주인은 혹시 모르니 자신이 길안내는 하되 바다에 도착하면 뒤에서 따라간다는 조건 하나만 말하고는 흔쾌히 그의 요구를 수락했다.
늦가을이라 그런지 바람이 더 차가웠다. 담요 몇장과 사진기를 챙긴 주인도 '오늘은 장난 아니네... ...' 라며 잠시 후들후들 거리다가 제 코를 쓱 닦는 시늉을 하고 그들의 길안내를 위해 앞장섰다.
카센 카네사다는 상상이 아닌 실물의 바다를 보러 간다는 생각에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추위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사요 사몬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잡으며 사요 사몬지는 저리 좋아하는 제 친우이자 연인인 카센 카네사다의 모습이 호소카와의 시절과 별 다른 게 없는 것 같아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며 카센 카네사다의 손을 잡고 쭉 걷다가 주인의 도착했다는 말에 카센 카네사다와 하늘을 번갈아 보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2
바다,
바다다.
마치 저도 모르게 넋을 놓은 듯 말하는 카센 카네사다였다. ''사요, 나... ...' 라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밤의 모래사장을 달리듯이 뛰쳐나갔다. 그가 항상 강조하는 우아함도 버린 체 어린아이처럼 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던 사요 사몬지는 의도치 않게 작은 웃음이 나왔고 그것을 본 주인도 소리 없이 같이 웃었다. 분명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함께 였다면 아이 같기는 커녕 그 자리에 서서 바다에 대한 온갖 수사나 단가, 하이쿠 등을 읊조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이 있는 이가 자신이었기에 우아함을 잊고 본연의 풍류를 저리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참 솔직하다고 사요 사몬지는 그를 보며 속으로 독백하였다.
"사요는 가까이서 구경 안해?"
주인이 그에게 묻는다.
"... ... 조금 추워서, 있다가."
"이거, 너와 카센 몫의 담요니까 혹시라도 바닷물에 닿거나 그러면 몸을 말리던지 감싸던지 해."
"쓸데... ... 아니, 고마워."
사요 사몬지가 주인에게서 담요를 받으며 무뚝뚝하게 답한다.
정말로 그는 아무런 감상 없이 바다를 조금 더 바라보고 있다가 카센 카네사다가 손을 흔드는 걸 보고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자연스레 잡았다.
"노사다."
"응."
"같이 옆에서 손을 잡고 밤하늘과 바다를 보자고 했지."
"기억하고 있었구나... ...! 사요."
카센 카네사다가 기쁜듯이 그를 바라본다.
"... ... 네가 하는 말은 웬만해서 기억하고 있어."
"사요도 참. 그러면 이제 같이 걷자."
"... ... 그래."
3
짧은 대화가 끝나고 사요 사몬지와 카센 카네사다는 걷기 시작했다. 모래사장의 부드러운 모래는 그간 밟아왔던 흙과는 너무 다른 감촉이라 조금 새로웠고, 노사다가 말한 파도라는 게 밀려와 자신의 발을 적시는 물의 느낌은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노사다와 같이 상상하면서 들었던 말 그대로였다. 자신의 이름처럼 푸른 밤은 날이 밝아 그런지 까맣지만 아름답게 푸른빛을 뿜었고 세기도 어려운 무수한 별들은 제각각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짝임이 진짜로 바다 위에 내려앉은 걸 보니 무엇을 보든 자신의 감상을 잘 표현하지 않는 사요 사몬지였지만 작게 입 밖으로 아름답다고 중얼거렸다.
"아름답네... ... 노사다 말처럼."
"그렇지? 나도 책이나 상상 말고 실제로 이 풍경을 보고 있으니까 좋아... 자연 그대로의 풍류는 너무 아름다워서 말로 표현을 못하겠어."
"응... ... 그렇네."
"사요, 나는... ..."
카센 카네사다가 기쁨이 목에 턱 막힌 듯이 말을 꺼낸다.
"... ... 이 순간이 나와의 좋은 추억으로 남을 거라 생각하니 기쁘다고 말하고 싶은거야?"
"응, 역시 사요는 잘 알고 있네."
"노사다와 같이 지냈던 때도 있고... ... 이 곳에선 쭉 함께였으니까 조금은 노사다의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네."
그의 말을 들은 카센 카네사다가 살짝 크게 눈을 뜨고 이내 웃는다. 그리고 무언가 떠오른 듯 뒤를 돌아보고는 크게 소리를 외쳤다.
"주인- 사진을 찍어주기로 하지 않았니?"
"아, 잠시만!"
주인이 카메라를 들고 허겁지겁 그들 근처로 달려갔다. 그의 손에 들린 큰 카메라를 보며 카센 카네사다는 난 아무리 봐도 이건 아직도 익숙치 않구나, 라고 말을 건넨다.
4
"사진이 밤이라 어둡게 나올텐데 괜찮겠어?"
"괜찮아."
"... ... 응."
"그럼 찍습니다?"
카센 카네사다가 사요 사몬지의 뒤에서 웃는 얼굴을 한 체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며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사요 사몬지는 잘 웃지 않았지만 분명 자신의 뒤에서 웃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같이 웃어야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색하지만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찰칵, 하는 소리가 몇번 나고 주인이 이제 됐다는 말을 한 후에 카센 카네사다는 다시 제자세를 유지하며 이제 할 건 다 했으니 돌아가자라는 말을 하자 주인과 사요 사몬지는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처음 보는 바다는 만족했어?"
주인이 그들에게 묻는다.
"아주 만족했단다."
"괜찮았어."
"다행이네. 그러면 사진은 조만간 인화해서 둘에게 줄게."
그리고 주인이 다시 앞장서기 시작한다.
"사요."
".... ... 응?"
"이렇게 또 추억이 늘었네."
"그러게, 노사다는 만족해?"
"물론이지, 사요와 함께인걸."
"... ... 네가 만족했다면 나도 만족해. 노사다."
어딘가 살짝 익숙치 않은 듯 부끄러움을 비치며 사요 사몬지가 이내 눈을 마주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린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도 똑같이 쑥쓰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서로의 손을 꼭 잡으며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1
'있잖아요, 상냥함이라는 건 무엇일까요?'
소녀티를 갓 벗은 여인이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 앞에는 끝을 가을의 단풍잎처럼 붉게 물들었지만 전체적으로 밤껍질색을 띤 머리카락과 햇빛에 그을린 것만 같은 까무잡잡한 피부가 잘 어울리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그녀가 있는 쪽을 향해 잠시 뒤돌아보다가 그녀와 그의 눈이 순간 마주쳤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여인은 눈이 마주쳤던 사내를 은밀하게 사모했다. 사실 그의 첫인상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편이었지만 그를 사모하게 된 경위를 말하라고 하면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그가 심하게 다쳐서 돌아왔을 때 수리실 안에서 그를 수리하며 몇마디 간단한 대화를 시작하게 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 이후로 그녀는 그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꼈으니.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옆에 앉아 있던 마에다 토시로가 제 주인에게 어딘가 몸상태가 불편하냐고 물어본다. 여인은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고 웃으며 혼자만의 비밀을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고 몰래 즐기는 듯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을 한다. 오늘도 오오쿠리카라가 다치지 말아야할텐데, 라고 또 다시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밤껍질색 머리카락의 그를 생각한다.
2
오오쿠리카라는 오늘따라 날이 쌀쌀한건가? 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왜냐하면 아침에 주인되는 이가 평소보다 옷을 두텁게 입은 걸 보았기 때문이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보며 추위를 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는 건 아닌가 싶어 돌아보니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쳐 애써 관심없는 척 고개를 다리 돌렸다.
자신은 원래 남에게 큰 관심을 가지는 성정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다테 가에서 지냈던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나 타이코가네 사다무네에게도 딱히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던 자신이지만 현 주인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눈이 가곤 했다. 왜 그녀에게 눈이 가는 걸까하고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어느 날 자신이 적에게 당하고 돌아온 날 수리실 안에서 그녀에게 수리를 받으며 이야기를 했던 날이 아닐까 하고 떠올리다 곧 아니겠지 하며 생각을 조금 부정해본다.
그래도 그 날의 대화에서 느낀 건 자신을 향한 절절하다, 라고 하는 감정이 아니었나 싶다. 오오쿠리카라는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싫지 않아서 그런지 이상하게 눈이 가기 시작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어딘가 마음 깊은 곳에 그녀가 자신의 무언가를 누르며 그 자리를 차지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인지 이번에는 원정을 가게 되었다. 오오쿠리카라는 아침에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잠시 떠올리며 돌아오는 길에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물건이라도 사와야겠다고 느꼈다. 그녀가 이 차디찬 나날들을 잘 견딜 수 있도록.
小夜時雨(사요시구레) : 밤에 오다말다 하는 가을 비
기븐님 리퀘스트. 현대 AU, 미츠타다 30세 회사원 & 쿠리카라 18세 고등학생 설정
떡 진짜 못 쓰겠어요 (울음)
* * *
1
그는 항상 그 곳에 있었다. 회사원이었는지 퇴근길마다 길거리의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를 나는 항상 보았다. 어울릴 생각은 없었지만 고양이는 귀여웠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뒤덮힌 그의 탄탄한 팔과 검은 가죽장갑을 낀 사이에서 살짝 드러나는 손목이 왜인지 눈길이 갔다. 그리고 내가 좀 더 고개를 숙인 순간... ...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이 미츠타다와의 첫 대면이었다.
2
미츠타다는 탁상 캘린더를 보며 스케쥴을 확인하고 있었다. 날짜를 하나씩 보며 벌써 10월 중반이구나 곧 나이를 한살 더 먹겠구나 하며 짧은 한숨을 쉬면서도 이내 웃었다. 그러다 자신의 무릎 위로 폴짝, 하고 뛰어오른 검은 털과 하얀 털이 섞인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익숙하다는 듯 고양이를 안으며 미츠타다는 자신의 방에서 나와 거실에 있는 가죽 소파에 앉았다. 고양이가 갸르릉 하고 우는 소리를 들으며 웃다가 곧 들려오는 빗소리에 그는 베란다 쪽을 보았다.
'비가 내리네... ...'
투둑, 투두둑 하고 들려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미츠타다는 웃었다. 가을 날 내리는 비라... ... 멋지네,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그는 오오쿠리카라 히로미츠를 떠올렸다.
"히로, 쿠리카라는 괜찮을까?"
미츠타다는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며 속으로 그를 걱정했다.
오오쿠리카라 히로미츠는 자신이 사는 멘션이 있는 동네의 남고에 다니는 고등학생이었다. 햇빛에 심히 그을린 듯한 피부와 끝부분을 붉게 염색한 머리카락과 무뚝뚝한 표정, 그리고 선이 굵은 얼굴과 제멋대로 입은 듯한 교복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양아치로 오해하곤 했다. 물론 미츠타다도 그의 옷차림을 볼 때마다 쿠리쨩이라고 부르며-그는 그 애칭을 싫어했지만 옷을 아무렇게나 입으면 안 됀다고 몇 번 잔소리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오오쿠리카라는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옷매무새를 바로 하였다.
그러고보니 쿠리카라를 처음 봤던 때도 작년 이맘때였지, 하며 미츠타다는 고양이를 내려놓고 베란다 근처로 다가갔다.
1년 전이었다.
동물을 좋아하던 미츠타다는 약 한달 전부터 자신의 퇴근길에 나타난 길고양이를 보며 가끔씩 쓰다듬어주거나 어느 날은 고양이 전용 캔을 사다가 먹이를 주곤 하였다. 고양이는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가 자신을 보고 귀여워해도 무심했지만 미츠타다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야옹, 야옹 하면서 그의 다리에 제 몸을 비비곤 했다. 그것이 사랑스러워 계속 쓰다듬고 귀여워하다가 어느 날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양이를 만지면서 옆을 보았는데 그 앞에 오오쿠리카라가 서있었고 눈이 마주쳤던 게 첫 만남이었다.
"고양이 좋아하니?"
미츠타다가 이내 웃으며 오오쿠리카라에게 말을 건 걸 시작으로 둘은 매일 같은 시각 그 장소에서 같은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짧지만 대화를 계속하다보니 연인 사이가 되었다. 물론 처음에 미츠타다는 아직 오오쿠리카라가 성인이 아니고 거기다 동성이니 그의 고백을 몇 번 거절했지만 오오쿠리카라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몇가지 조건을 걸고 사귀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오오쿠리카라가 성인이 되기 전 까지 키스와 포옹 이외에 유사 성행위를 포함한 모든 성적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었다.
3
비가 멎는 소리가 들렸다가 이내 다시 내리는 소리가 몇 번이고 반복 되었다. 오오쿠리카라가 집에 밤늦게 들어가는 걸 알고 있는 미츠타다 였기에 오늘 같은 날은 걱정이 유독 깊어져갔다. 왜냐하면 그는 근 1년동안 몇 번 비가 오는 날엔 비에 젖은 체로 미츠타다의 집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미츠타다는 그 때마다 이유를 묻지 않으면서 따뜻한 코코아와 함께 머리 말릴 수건을 건넸다. 몇 번 잔소리를 했지만 도통 먹히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 비 맞고 돌아다는 것에 대해 잔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오늘도 우산을 쓰지 않고 밤늦게 까지 거리를 돌아다닐 오오쿠리카라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 속 어딘가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미츠타다는 그게 오오쿠리카라라는 걸 거의 확신했지만 그래도 만일이라는 것이 있으니 작은 구멍을 확인하고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문을 열었다. 역시나 그는 흠뻑 젖은 모습이었고 미츠타다는 이내 수건을 가져와 익숙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흠뻑 젖었네. 쿠리쨩, 마실 것도 필요해?"
"... ... 오늘은 필요없어."
오오쿠리카라는 자신의 가쿠란을 벗어 접은 다음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두고 소파에 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미츠타다도 옆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오늘은 어땠고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사소한 것만 물어보았다. 그의 질문에 오오쿠리카라는 간결하게 대답했고 자신의 답이 다 끝나자마자 돌연 그의 얼굴을 보더니 그대로 달려들더니 쓰러트렸다.
"쿠리쨩, 지금 뭐하... ...?"
미츠타다의 두 손목을 꽉 쥔 그가 여전히 다름 없는 굳은 표정으로 미츠타다의 두 손을 자신의 가슴팍에 얹어놓다가 만지게 했다. 갑작스러운 오오쿠리카라의 행동에 미츠타다는 그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4
"미츠타다."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몸 위에 올라타듯 올라가 그가 입은 바지와 속옷을 전부 벗기기 시작했다. 속옷을 벗기자 미츠타다의 페니스가 모습을 드러냈고 오오쿠리카라는 잠시 미츠타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그것을 핥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자신의 페니스에 닿는 느낌과 키스할 때 느꼈던 그의 부드러운 혀의 감촉이 동시에 맞물림과 함께 미츠타다는 저도 모르게 으흥... ...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이내 얼굴이 화끈해지고 아래가 뜨거워지면서도 젖어드는 느낌이 밀려오는 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죄책감이 느껴졌다.
"쿠리쨩... ... 하아... ..."
미츠타다가 오오쿠리카라의 이름을 부르며 참을 수 없는 듯 야릇한 소리를 연거푸 낼 때마다 오오쿠리카라는 더 빠르게 그의 페니스를 위아래로 핥아내렸다. 그러자 미츠타다의 신음소리도 같이 빨라졌고 곧 안 돼겠는지 결국 그의 입 안에 사정을 했다. 가쁜 숨을 약간 쉬며 자신의 정액을 입 안에 머금고 조금씩 꿀꺽 삼키고 있는 오오쿠리카라를 보며 미츠타다는 놀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쿠리쨩 그거 삼키지마!"
놀란 미츠타다가 억지로 그의 입 안에 있는 자신의 정액을 빼내려 하자 오오쿠리카라는 저항하듯 그를 밀쳐내고 질 수 없는지 남은 정액을 한꺼번에 삼키고는 바로 인상을 썼다. 그의 모습을 본 미츠타다는 경악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과 약속한 것을 어겼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 시작했지만 감정을 억누르려 했다.
"... ... 미안, 미츠타다."
"... ... 어?"
"약속을 어긴 건 알아."
"쿠리쨩... ... 알면서 왜 그랬어?"
"난 만약 네가 나와 섹스를 한다해도 미워하지 않는다."
곧바로 그러니까, 라는 말만을 천천히 하고 오오쿠리카라는 이내 제 두다리를 벌려 미츠타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표정은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그를 보며 미츠타다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왼팔로 그의 다리를 잡았다.
'이렇게 되면 그간 참은 게 다 소용 없잖아.'
"쿠리쨩."
"응."
"미안해."
미츠타다는 그와 입을 맞추며 혀로 안을 비집고 들어가 그의 혀를 건드리며 조금씩 농락하는 한 편 그의 애널에 제 가운데 손가락을 넣으며 난공불락의 요새를 무너뜨리듯 휘젓기 시작했다.